닫지 못하는 틈으로
안팎(미술평론가)
면이 거친 합판으로 마감한 낮고 좁고 환한 방. 아직 비어 있지만 들어가기는 조심스럽다. 한쪽에는 화구가, 한쪽에는 악기가 놓인 두 개의 자리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곧 홍보람과 심운정이 들어오면 한쪽은 선방禪房 같아, 한쪽은 신당神堂 같아 보일 방이다. 둘은 여기서 서로를 의식하며 ― 서로를 살피고 서로에게 답하고 서로를 밀거나 당기며, 때로는 부러 외면하며 ― 이리저리 선을 긋고 이런저런 소리를 낼 참이다. 아직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그곳을 보러 가는 길에, 둘의 퍼포먼스를 앞질러 눈과 귀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틈들, 구멍들, 그리로 들고 나는 것들. 좁은 방은 낡은 건물의 이 층에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데 왼쪽으로 보와 지붕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벽을 타는 덩굴이 보인다. 계단 끝에 닿아 가느다란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커다란 구멍이, 구멍으로는 부산한 아래층이 보인다. 철근으로 만들어 몸이 닿을 때마다 희미하게 울리는 난간을 따라 한 바퀴를 빙 돌자니 카펫 아래에서 마루가 종종 삐걱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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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두 사람이 자리에 앉는다. 선방 같아 보이고 신당 같아 보이지만 속으로 침잠하는 이도, 미지의 무언가와 만나는 이도 없다. 대신 여기에는 좁은 방 가운데의 빈 공간에서 서로를 만나는 두 사람이 있다. 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이제 둘은 마주 앉아 서로를 좇으며 각자의 길을 간다. 홍보람은 심운정의 소리를, 심운정은 홍보람의 붓질을 신호 삼아 앞을 가늠하고 길을 튼다. 자신을 좇는 상대를 좇는 것이므로 실은 누가 누구를 좇는지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신에게서 출발해 상대를 경유하고 또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순환이거나 둘 사이의 틈에 머무르며 서로에게 기대고 엉겨 붙는 춤이다. 홍보람이 일순 손끝의 속도를 줄인다. 종이에서 붓을 떼려나 하는데 그대로 휙 꺾어서는 다시 속도를 높인다. 심운정이 들고 있던 쇠를 내려놓고 채를 한 움큼 집어 든다. 그중 한둘을 고르는 대신 채들을 비벼 쇠에서는 날 일 없는 소리를 낸다.
관객은,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어딘가 불안하다. 이 즉흥적이고 상호적인 움직임이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도 그렇지만, 움직이고 소리를 내는 것이 둘만이 아니어서 더더욱 그렇다. 문밖에 서서 볼 수 있는 것은 둘의 옆모습뿐이므로 비스듬하게나마 어느 한 사람의 정면을 보려면 관객은 좌우로 한두 발짝씩을 움직여야 한다. 그럴 때마다 마루가 삑 삑 소리를 낸다. 잠자코 있지 못하는 낡은 건물은 바깥의 소음을 거르는 법도 모른다. 좁은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말소리, 누군가 끌고 가는 손수레 바퀴 구르는 소리 같은 것들이 자주 치고 들어온다. 아무도 지나지 않을 때면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어 창틀을 흔든다. 조금 떨어져 앉은 두 사람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주고받으며 만드는 무언가가 이 공간을 채우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기대와는 꽤 다른 일을 겪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바로 틈을 찾아 들어가는 일, 틈을 열어두는 일, 열린 틈으로 들어가 만난 것과 뒤섞인 채 다른 틈으로 빠져나가는 일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객석 뒤쪽에 있는 새빨간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다는, 관객 역시 마음껏 움직여도 좋다는 뜻이다. 아직은 고요하다. 홍보람은 붓을 씻고 물접시를 닦는다. 심운정은 여럿을 오가는 사이 흐트러진 악기들을 정리한다. 마치 다시 돌아오리라는 듯 두 사람 다 일부만 챙겨서 일어선다. 초록 불은 바꾸어 말하자면 삐걱대는 마루를 개의치 않고 밟아도 좋다는 신호였겠으나 관객은 여전히 문간에 가만히 서 있다. 그 곁을 지나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멀찌감치 앉는다. 홍보람은 거실에, 심운정은 거실을 지나 당도한 방의 단상에 앉았다. 심운정은 벽을 바라보고 있다. 홍보람의 시야에는 문 너머 앉은 심운정의 옆모습이, 그러나 뒤통수와 어깨와 등허리만이 보인다. 관객들은 끝내 머뭇거리다 현관쯤에서 홍보람의 등을 바라보고 섰다. 달라진 관계 속에서도 이 층에서 한 일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짐작하기 어려운 손놀림들이 이어진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도, 바람이 내는 소리도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흔들리는 현관문을 등으로 지그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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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간. 이번에는 멀리서 시작한다. 심운정은 이 층 한구석에, 홍보람은 일 층 한가운데에 앉는다. 관객들은 난간 창살을 가로질러 심운정을, 구멍을 통해 홍보람을 보지만 둘은 서로를 보지 못한다. 아까의 심운정은 이따금 고개를 돌려 홍보람을 힐끔거렸지만 이제는 그조차 할 수 없다. 그저 홍보람이 소리를 들을 뿐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순환이, 혹은 서로 기대고 엉키는 일이 유예되고 위에서 흘러내린 소리가 아래의 종이에 고이는 형국에 놓인다. 하지만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둘 모두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관객 하나하나는 그 흐름의 지류가 된다. 종종 눈마저 감고 소리를 내는 심운정을 어디론가 이끌어 방향을 틀게 한 것이 있다면, 그 일부는 아마도 관객들이 아래로부터 끌어올린 무언가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관객들은 신중히 몸을 사리지만, 입을 열거나 발소리를 내지 않아도 이미 무언가 발하고 있다. 여기 모인 모두에게 어떤 틈이 있다. 혹은 여기 모인 모두가 모두 틈이다.
이윽고 다시 초록 불이 들어오고 두 사람은 아래층의 단상에 ― 시야를 반쯤 가리도록 걸린 악기들을 사이에 두고 ― 마주 앉는다. 따라 내려간 관객들이 둘을 에워싼다. 두 사람이 흘리지 못하고 모아두었던 것을 얹어 또 소리와 그림을 주고받는 동안 둘러앉은 관객들은 자리를 지킨다. 한동안 초록 불이 유지되는데도 자리를 옮기는 이가 없는 것이 좁은 통로를 지나며 다른 이의 시야를 막기 곤란해서인지 그 오감에 집중해서인지를 알기는, 여기서도 관객이 제각기 흐르는 지류였는지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숨소리든 체온이든을 계속 흘렸다는 것, 한 칸 안으로 들어온 것뿐인데도 거리의 소음은 꽤나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곳이 그저 고요하지는 않았다는 것, 아무런 개입 없이 두 사람이 마음껏 채울 수 있는 백지 같은 공간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날 여기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틈을 열어두기로 한 두 사람의 이를테면 용기와 환대 덕분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틈이란 빠짐없이 메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들이 보여주고 들려준 것이 ‘찰나의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음악이란 사라지기 때문이거나 음악이 끝날 때 붓질도 멈추기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거기 모인 모든 것이 찰나의 존재들, 닫을 수 없는 틈으로 수많은 것이 드나들기에 늘 흔들리고 시달리고 변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는 뜻이다. 어떤 소리에 반응에 붓을 튼다. 어떤 선에 반응해 소리를 그친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그림자에 혹은 소음에 맞추어 점을 찍고 박자를 바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또한 종종 무언가를 내보내는 일이기도 하므로, 혹은 무언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또한 종종 무언가가 밀려난다는 것이기도 하므로 ― 찰나의 존재로 채우기로 한 이 공간의 주인공은 어쩌면 언뜻 나타난 소리나 선이나 두 사람이 말없이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흐르고 새는 틈들, 그 무엇으로도 단단히 메울 수는 없었던 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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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들의 용기나 환대 덕분이기보다는 애초에 틈이 열려 있는 탓이라고 했지만, 닫지 못하는 것은 애써 닫지 않기로 하는 것, 피하지 않고 스스로 틈이 되기로 하는 것은 기꺼이 스러지고 벌어지기도 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이것저것 그러모아 제 것으로 삼고 단단해지는 대신, 막지 않고 받아들인 것을 아끼지 않고 다른 틈에 흘려 넣고 자기는 다시 텅 비기로 하는 환대이기도 하다. 시간이 끝나고 몇몇씩 모인 관객들이 자신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잊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훔쳐 들으며 두 사람이 자리에 남겨 두고 온, 지켜보는 이 없이 남아 있는 화구와 악기를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먹을 뿌리거나 징을 울릴 수 있을 것임을, 당장이라도 그 위로 무언가가 쏟아질 수 있을 것임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