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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희와 홍보람의 『공명하다』 전시를 열며

아트스페이스·씨 대표 안혜경

“모든 예술적 행위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끔 하고, 내부적인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 전환시키는 것이다.” – 미술사가 페터 라우트만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시시 때때로 자신에게 묻는다. 자연의 변화를 특히 예민하게 관찰하고 민감하게 포착해 내면으로 끌어들여 우리들 삶에 되비춰 질문하며 작업으로 조응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작가 허윤희와 홍보람 역시 자연과 교감하며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창을 열고 있다. 홍보람은 허윤희의 개인전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감성으로 작업하는 선배작가가 있음을 알고 허윤희의 작업실을 찾아간다. 이 두 작가의 만남을 허윤희 작가의 책 ‘나뭇잎 일기’(궁리, 2018년)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이 두 작가는 자연과의 교감에서 울려나온 색과 형태를 일기 쓰듯 그림과 단상으로 기록한다. 그것은 이 작가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작 작업의 기초 연구 자료이다. 이 두 작가가 목탄을 주로 이용해 드로잉 작업을 한다는 점 역시 주목하게 되었다.

허윤희는 목탄을 긴 막대기에 묶어 삭삭 그어 겹친 선들과 지워진 흔적으로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작업을 해왔다. 이 때 바닥에 떨어진 목탄가루는 방문객들의 신발바닥에 묻어 전시장 안·밖으로 흩어진다. 마치 벌과 나비가 의도치 않게 꽃가루를 다리에 묻혀 사방에 퍼트려 씨앗을 맺게 하듯! 결국 그림은 지워지고 감동은 목탄 가루와 함께 멀리 퍼져나간다.

‘유학시절(1996-2003)은 개인의 실존, 그 내면의 삶에 집중돼있었다’.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갈등과 억압의 상처에 절망하고 메마름과 갈증을 치유할 따스함을 희구하며 유영과 비상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뿌리내린 삶을 동경하는 마음이 작업의 모티브였다’(미술이론 이영욱). 그런데 작가는 귀국 직후 시장의 채소가게에 수북이 쌓인 흙 묻은 배추다발 앞에서 눈물이 터졌다. ‘밖에서만 출렁이던 물’이 안으로 들어와 메말랐던 내면에 생명의 물을 가득 채우게 된 계기다.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롤프 틸레 교수는 ‘허윤희의 예술 작업에 대한 소고’에서 “그녀의 그림과 시의 행간에서는 동경의 모티브를 읽을 수 있고 또 불행한 의식의 고통이 미적 파토스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예술적 변환이야 말로 그녀가 그림과 글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호와 상징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의 고통과 열망’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치유’를 시도하였고 녹색 사상을 접하고 자연과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면서 결국 “나로 부터 우리”로 작업적 관심과 표현이 확장되었다.

작가가 나무와 뿌리와 손과 발과 씨앗과 꽃과 새와 서로 교감하는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 흡수되며 ‘변신’한다. 작가는 때때로 색채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거친 질감과 투박한 표면 위에 날것의 감각’을 담아내는 목탄으로 긋고 지우는 과정 속에서 겹겹이 그 흔적을 쌓는다. 시, 그림, 대형 벽화, 퍼포먼스, 비디오 영상 등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삶의 경험을 통한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보는 이들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 를 담아낸다. 즉, 작가는 작업을 통해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자 한다. 작가는 시선을 “사회와 자연으로 좀 더 확장”하면서 인간문명의 파괴적 한계를 자연 순환의 세계로 끌어들여 극복해보려는 예술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2008년 5월5일 부터 거의 매일 산책 후 가져온 낙엽을 실물 크기로 공들여 그리고 이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적은 <나뭇잎 일기>는 “소소하지만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한 생명체에 대한 경외의 시선과 함께 일상의 의미를 새삼스레 숙고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일상의 삶과 그림 그리는 일의 경계가 지워지고 삶과 미술의 구분도 사라지면서 이루어진 이 작업은 일상에서 느리게 걷고 소요하면서 비로소 발견한 것들, 그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일, 그리고 이를 공들여 그리고 그에 대해 떠도는 단상을 지극한 마음으로 기술하는 일이 두루 얽혀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박영택(미술비평)

허윤희는 이번 전시에서, 목탄은 종이에 그어지고 지워지며 물 가득 품은 배추가 되었다가 나뭇가지에 둘러싸인 맨발이 되기도 하고 씨앗을 뿌리는 손이 되기도 하며 새가 되어 날아가기도 하고 대지를 깨우는 숨이 되기도 하고 어딘가로 노저어갈 배가 되기도 한다. 공기를 데우는 따뜻한 난로가 되었다가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같은 천사의 날개가 되기도 하고 얽히고설킨 나무의 뿌리가 되었다가 나를 감싸는 담쟁이도 된다. 수차례 겹치고 겹쳐 그은 목탄의 흔적은 세상과 만나는 작가의 손이고 발이고 마음이다.

지난 수 년 간 지속해온 목탄 작업들과 매일 매일 산책에서 가져와 짧은 단상과 함께 세밀하게 그린 나뭇잎 채색화 그리고 배에 실려 어디론가 향하는 ‘마을-제주’를 그린 대형 목탄작업, 유학 초기시절에 읽기 힘든 독일어 책을 펴고 활자위에 매일 일기처럼 그린 그림들이 담긴 책자와 영상 기록물(윤희그림 영상과 목탄으로 그리고 지워나간 과정 기록) 등을 소개한다.

홍보람은 개인의 한계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 개인의 경계너머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인 경험들을 드로잉, 판화, 페인팅 그리고 영상 혹은 소리가 포함된 설치 공간으로 창작하고 있다. <마음의 지도>라는 이름으로 2002 년부터 부지런히 사람들을 직접 만나 공간과 연관된 그들의 기억을 숙성시켜 드러내 치유하고 치유 받으면서 서로 성숙시켜나가는 오랜 프로젝트를 꾸준히 하고 있다. 이 작업은 때를 기다려야 하는 자연의 시간처럼 천천히 스스로 움직여지길 기대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헬싱키, 후쿠오카, 홍대와 대학로, 인천, 제주 월평마을. 제주 강정마을, 북한이탈주민, 제주도립미술관, MMCA 페스티벌, 서울 온그라운드, 4.3생존 희생자 등). 인디밴드 Fortune Cookies의 보컬로 음악활동을 하였고 쌈지거주작가로 음반을 발매하였고 아트워크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친구들의 즉흥 음악 연주를 들으면서 그 느낌과 에너지를 즉흥적인 드로잉으로 표현하는 작업들도 해왔다.

아트스페이스·씨가 기획한 세 차례의 개인전과 작가가 직접 기획에 참여한 그룹전을 아트스페이스·씨에서 가진 바 있다. 이중섭거주작가(2009)기간, 제주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용암의 생성 분출과 대지의 형성 그리고 물과의 만남, 물과 물의 관계, 용암과 물이 만나 굳어진 현무암과 파도에 닳고 닳아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바위들, 올록볼록 솟은 오름’ 등으로, ‘어떻게 서로가 만나 서로를 내포하고 영향을 미치는지’, 자연 에너지와 그 형태를 이해해나갔다. 그 느낌을 종이에 ‘파스텔과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른 그림들’과 ‘펜으로 그어 경계가 분명한 선과 모양의 꼴로 표현한 드로잉’들은 태초에 생성의 기억이 함유된 자연의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소설가 현기영은 강정 해안 구럼비 바위를 ‘들끓는 용암과 바다의 위대한 담금질로 새겨진, 천태만상의 정교한 문양과 디자인과 색채가 각인된 아름다운 추상화’라고 표현 하였는데, 해군기지 건설로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 ‘구럼비 바위’를 2011년 섬세하게 탁본하였다. 2012년 그 탁본과 <마음의 지도-강정마을> 작업으로 ‘울려퍼지는 두드림’ 전시를 준비 중에 안타깝게도 구럼비바위가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폭파되었다. 그 아름답던 바위는 해군기지 밑에 깔려 시멘트로 생매장되었고 그 탁본은 그 바위를 기억하게 할 영정그림이 되었다.

홍작가는 제주로 이주해 7년 째 살고 있는데, 자연의 다양한 변화와 생동감으로 얻어진 영감과 존재 에너지를 삶의 곳곳에서 은유되는 추상화로 표현하고 있다. ‘생각이나 느낌을 형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인간 인식이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기적이며 대칭적인 모양과 형상으로 존재하게 하는 에너지를 느끼고 배우며 연구’한다.

최근 4.3 생존 희생자들과 작업하며 ‘인간이란 무엇일까,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등에 대한 의문과 고민들이 깊어졌고 그런 고민들을 자연의 이치 속에서 이해하며 작업으로 연결해나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홍보람은 숲에서 흔히 보이는 솔방울과 나뭇잎, 돌멩이 등 자연물이 기본적인 형태가 갖는 에너지에 주목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주고받는 자연의 에너지가 그 속에 존재하는 생명력과 맞물리며 나와 네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나의 경계가 수많은 구멍으로 다른 것들에게 열려 있는, ‘존재의 순간’으로 종이에 목탄으로 그려낸 “존재하기” 시리즈 작업으로 공유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형태는 작가가 태어나서 봐왔던 무수한 자연의 형태들이며 동시에 작가가 매일 살을 맞대고 지내는 가족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의 형태이기도 하다. 허윤희 작가와 함께 작업과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를 부드럽고 연약한 형태에 담은 조형물도 만나게 된다.

이 두 작가는 모두 세상과 조우하는 자신들 작업의 근원을 자연에서 찾아낸다. 헨리 D. 소로우는 “자연 연구에 익숙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인간 연구에 훨씬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고 그의 일기에 적었다. ‘혼자로선 의미가 없으며 너와 함께 하는 우리들의 관계 맺기에 대한 생각’을 ‘세상은 다 연결되었다는 생태적 감성’으로 끊임없이 담고자 하는 허윤희.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미물인 인간이지만 그 인간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인간 안에도 우주만큼 광대한 이해 불가능한 것이 들어있음을 놀라워하며 존재의 에너지를 자연에서 찾아내고 있는 홍보람.

제주의 지하수를 품고 있는 곶자왈 야생숲에는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대지에 뿌리내린 나무들이 있다. 바위에 틈을 내며 부수어낸 흙에도 뿌리가 침투하듯 뻗어 내린다. 바위와 뒤엉켜 뿌리내리며 자라는 초목이 버텨내는 생명의 에너지가 경이롭다. 오름에 서서 높고 푸른 하늘에 동동 뜬 구름과 태평하게 풀을 뜯는 소를 바라본다. 늦은 오후 태양빛이 구름 뒤에서 비쳐들던 구름은 금빛 테두리를 두른다. 혹시 기억으로만 남겨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하는 난개발 때문에 이 풍광이 요즘 더욱 시리게 아름답다. 이 두 작가가 생태적 감수성으로 자연과 교감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해낸 작업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공명하다> 전시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건강하게 양육된 감각은 자연에 공감하여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헨리 D.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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