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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부드러운, 우호적인, 위안이 되는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헨리 무어는 템즈 강변을 산책하다가 주워온 조약돌에서 착상을 얻어 현대조각의 문을 열었다. 모난 데가 없이 순한 곡선으로 이어진 유기적인 형태와 형태에 구멍이 뚫린, 그래서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조각, 공간과 공간을 여는 조각, 그러므로 조각의 영역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하는 조각이다. 유기적인 형태도 공간적인 조각도 모두 자연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조약돌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조약돌은 원래 산에서 온 것일 터이다. 산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돌이 되고, 돌이 자갈이 되고, 그리고 마침내 조약돌이 된 것일 터이다. 비와 바람이, 천둥과 번개가, 폭풍과 파도가, 낮과 밤이, 시간과 세월이, 그러므로 자연이 산을 조약돌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이 하나의 형태를 빚어내기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번민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홍보람의 작업이 그렇다. 그의 작업은 얼핏 그 형태가 아리송한 추상처럼 보인다. 관념적 추상? 감각적 추상? 아니면 자연적 추상? 아마도 어느 정도 이 모두가 합치되었을 그의 작업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특히 자연을 추상화한 형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조약돌 같고, 조가비 같고, 부목 같고, 섬 같고, 풍경 같다고 해야 할까. 작가가 제주도에 산다는 것이 힌트가 될까. 제주도에 산다는 것은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이며,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고, 작가가 그렇다. 환경결정론이다. 환경이 작업에 영향을 미치고 작업의 성향을 결정한다. 모든 결정론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고, 작가가 그렇다. 아마도 애당초 작가적 유전자에 자연에 대한 끌림이 있었고, 그 끌림을 따라 제주도에 정박하게 되었을 것이다. 제주도 해변에 떠밀려온 이름 모를 부목처럼. 시간에 등 떠밀린 조약돌처럼.

자연주의자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했다. 작가의 조형은 이처럼 모난 데가 없이 순한 곡선으로 이어진 유기적인 형태와 함께, 하나같이 칠흑 같은 흑색을 머금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자세히 보면, 그 표면에 크고 작은 정형 비정형의 구멍이 뚫린 것도 같다. 색도 구멍도 제주도에 흔한 화산석이며 현무암에서 온 것일 터이다. 칠흑 같은 밤바다와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서 유래한 것일 터이다. 바람과 시간과 어둠이 공모한 풍화와 풍파가 작가의 내면에 스며든, 그렇게 파고들면서 일깨워진 파토스가 외화된 것일 터이다. 자연의 어둠(벨벳처럼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으로 존재를 감싸는)과 작가의 어둠(쉼과 휴식, 치유와 정화, 그리고 때로 격정의 거소인)이 하나로 합치되었다고 해야 할까. 자연에서 캐낸 자기, 그러므로 자연에 투사된 작가의 인격의 색감이며 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조형은 조약돌 같고, 조가비 같고, 부목 같고, 섬 같고, 풍경 같다. 그중에는 아마도 구름을, 바람을, 파도를,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 아니면 유리창에 흘러내리다 맺힌 빗방울의 질감을, 그리고 밤에 보면 칠흑 같은 어둠을 머금은 실루엣이 더 오롯해 보이는, 오름을 추상화한 형태도 있을 것이다. 때로 꼭 자연에서 온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내면적인 관념이 추상화된 형태도 있을 것이다. 이 일련의 형태들을 작가는 《존재하기― 위안의 형태들》이라고 부르고, 아니면 그냥 《위안의 형태들》이라고만 부른다. 존재하기.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존재의 안부를 묻고 안위를 묻는 작업이었다. 존재론적 작업이고 자기반성적인 작업이었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존재의 존재다움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일이라고 했다. 여기서 존재의 존재다움, 그러므로 존재다운 상태란 어떤 상태이며, 또한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저마다 지향하는 의미가 다르고 형식이 다르지만, 이 모든 다름과 차이가 결국에는 존재가 존재다운 상태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고 해도 좋고, 그것이 예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존재의 존재다움, 그러므로 존재다운 상태를 위안을 주는 형태들에서 찾는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작가는 자연(그러므로 어쩌면 내면화된 자연)에서 위안을 찾는다. 모난 데가 없이 순한 곡선으로 이어진 자연의 유기적인 형태에서, 벨벳처럼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으로 존재를 감싸는, 쉼과 휴식, 치유와 정화, 그리고 때로 격정의 거소이기도 한 자연의 어둠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처럼 손안에 꼭 쥐어진,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을 기억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을 하나의 작은 조약돌이 주는 위로, 그러므로 자연이 주는 위안의 형태들을 작가는 직접 만들고 그리는데, 송판을 자르고 붙이고 깎아서 형태를 만든다. 일정한 두께를 갖는, 벽 위로 돌출돼 보이는 저부조 형식의, 틀로 치자면 변형 캔버스라고 해도 좋을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호분과 때로 종이 분을 발라 피부를 입힌다.

그리고 먹으로, 때로 목탄으로 촘촘하게 선을 그어 교차시키는데, 그렇게 교차 된 선들이 모여 형태는 흑색을 덧입는다. 중첩된 먹선이 칠흑 같은 어둠과 함께 표면에서 번쩍거리는 발광 효과를 준다면, 목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더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내면화된 질감이 느껴진다. 선을 교차시켜 면을 만들고 색을 형성시키는 경우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렇게 교차된 선과 선 사이로 드문드문 맨살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꼭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의 표면 질감을 보는 것 같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도 같다.

앞서,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직선들, 사선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엄밀하게 말해 자연에 직선이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사선을 그리며 내리는 비와 같은). 자연의 유기적인 형태(그 자체 곡선으로 나타난)에 대한 작가의 개입과 간섭과 해석이 직선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자연에서 찾아낸 내적 질서, 자연의 기하학, 자연과 작가가 부합하는, 그러므로 자연에 투사된, 정작 작가 자신의 질서 의식의 표상, 다시 그러므로 작가가 희구하는 질서 의식의 표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자연에 직선이 없을지는 모르나, 규칙과 패턴은 있다. 아마도 그런, 자연의 내적 질서, 자연에 내재된 규칙과 패턴이 외화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게 뭔가. 결이고, 겹이고, 주름이다. 자연의 피부 위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때로 피부 아래 숨겨진 것이 결이고, 겹이고, 주름이다. 자연이 살아온 삶의 증명이며, 시간이 아로새긴 증거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교차 되는 직선으로, 중첩되는 사선으로 작가는 구름이, 바람이, 나무가, 조약돌이, 숲이, 바다가, 하늘이, 낮이, 밤이 겪었을 삶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의 조형은 다만 소리로만 보이는, 조약돌과 파도가 희롱하는, 별빛이 어둠을 애무하는, 어떤, 경계의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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