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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한 관조와 투명한 위안 - 홍보람 작업에 대한 소고

구나연(미술비평가)

 

자연에 매료되는 이유를 비단 아름다움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문득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 갈 때, 자연은 경이라는 선물을 준다. 자연은 그대로의 존재방식으로 현존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특별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와 자연 사이에 심오한 관계 맺기가 형성된다. 이는 자신이 자연 현상의 안에 있으며, 또한 그런 현상의 하나이면서, 조화되어 변화하는 동적인 양상이다. 홍보람의 작업은 이렇게 맺어진 관계와 그로부터 비롯된 형상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자연의 형태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되지만, 구체적인 재현적 이미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작가가 자연과 담담히 마주하는 작은 순간에 만들어지는 연결의 지점이며, 이로부터 비롯된 정서를 어떤 실체로 생성시킨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부드럽고 견고한 흐름을 갖고 있으며, 감각에서 모양으로, 모양에서 입체로 변이하며 점차 물리적 존재로 나타난다. 합판을 맞대어 두께를 갖게 되고, 여기에 호분 아교를 발라 형체를 확고히 한다. 그 위로 먹을 이용하여 지난한 종횡의 선 긋기가 수행되면서 그의 형상이 칠흑의 검은 물체이자 이미지로서 단단하게 변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위안의 형태’에 도달한다. 작가의 경험과 자연의 지속적인 순환이 마주치며 드러나는 확고한 교류가 안정과 위안의 형태들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대끼고 밀착되는 마찰의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연과 묵묵히 마주할 때 드러나는 추상적이며 자유로운 순간의 공유이다.

또한 홍보람의 작업은 흑백의 평면 드로잉에 머물지 않고 단단한 물성을 지닌 ‘부조적 회화’로 융기한 결과이다. 구체적인 재현을 통해서가 아닌, 形 자체가 발휘하는 농축된 힘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또한 단단하고, 벽에 붙어 부동하면서도 불쑥 솟아오른다. 이러한 이중적 상태는 드로잉에서 시작되어 구체적 실재로 전환된 순간의 응고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형상이 지닌 흑백의 패턴은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닌, 선이 ‘쌓여’ 발화하는 어울림과 몰입의 결과이다. 즉 그가 현재를 살아가며 찾은 위안의 감정이, 몰입으로 드러난 형태와 색 자체의 발화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서 금방 흘러내릴 듯한 밀도와 선들, 무수한 농도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견실한 조화로 안내한다. 그리고 이것은 검은색과 흰색의 교차가 형성되는 것으로 더욱 고조된다. 그의 작업이 지니는 흑백의 층위는 자연이 지닌 무한한 색채가 잠시 잠잠해지는 시간, 강렬한 실루엣만으로 순간의 묵직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명료함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모난 곳 없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그의 이미지 안에는 멀리 한 사람이 어른거리는 착시의 그것, 혹은 먼 바다의 신기루인 듯한 하나의 섬처럼, 굳건하고 희미한 빛과 어둠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흑백의 형태들은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완고한 개체이면서, 이들을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가변적인 형상의 조화와 서사성을 갖게 된다. 무한히 변화하는 자연의 상태로부터 현현한 작품은 저마다의 실체를 지니지만, 언제든지 반목과 조화를 이뤄내는 전체의 부분이기도 하다. 하여 이것은 자체의 두께와 거리를 보유한 독립적 사물이면서, 우리가 어떻게 보고 이어내는가에 따라 각기 연결되는 공존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를 통한 특유의 역동성은 위안의 형태를 때로는 멀리 있는 것으로, 때로 가까이 움직이는 것으로 변화무쌍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만 빈번히 그것을 객체화한다. 홍보람의 작업이 평면과 입체, 개체와 전체, 선과 색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면, 이는 자연에의 同化와 異化를 오고 가는 우리의 오랜 태도와 관련된다. 고정될 수 없는 변화와 그 율동이 위안의 형상으로 빚어지면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드라마틱하고 장엄한 특수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묵묵히 보유하고 있는 힘들이 작가의 일상 속에 내비칠 때 갖게 되는 몰입과 치유에서 온다. 그리고 홀로 현재의 삶 속에서 마주한 작은 위안의 순간들이 형태가 되어 체현되면, 그것은 곧 우리를 향한 위안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묵묵한 관조의 산물로서, 또한 투명한 위안의 산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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